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도전(드라마)/역사적 사실과의 비교 (문단 편집) === 제41회 ~ 제42회 === * 짧게 지나갔지만 이성계의 즉위식에서 남은이 국궁(鞠躬), 사배(四拜), 흥(興), 평신(平身)이라고 외치는데 몸을 굽히고 네 번 절을 하고 일어나라는 의미로 궁중 의례의 절차이다. * 이방원이 정도전과 대면하여 정도전의 관직과 칭호를 전부 나열하는데 맨 마지막에 [[군(작위)|봉화군]](奉化君)이 나왔다. 대화 시점은 아마 태조 1년(1392)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실록을 보면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107028_005|당시 정도전의 작위가 봉화군이었으므로]] 정확한 반영이다. 이후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507027_001|태조 5년(1396)에 정도전의 작위가 봉화백으로 변경]]되며, 제47회에 그 사실이 반영돼 자막에 '정도전(봉화백)'이라고 뜬다. * 유생들이 조선 개국 후 첫 과거시험에 집단거부를 한 것으로 연출했으나 실제로는 그런 것 없었다. 조선시대 첫 문과시험은 개국 직후가 아닌 그 다음해인 태조 2년(1393)에 실시되었고, 최초 합격자 99명에 태조가 직접 3명을 추가로 합격시켜 최종합격자는 102명이다.[* 이때 합격한 사람중 하나가 나중에 이방원의 심복이 되는 [[이숙번]].] 사실 이 장면은 [[용의 눈물]]에서 조선왕조의 첫 과거시험의 주제가 '조선 개국의 정당성을 논하라'라는 것을 유생들이 보고 이성계 눈앞에서 단체로 시험거부를 하는 장면을 오마주한 것이다. 또 이제는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극중 등장한 [[두문동 72현 전설|두문동]]의 일화는 [[야사(역사)|야사]]이다. * 정도전이 황거정을 사주해 이숭인 등 이색 계열 신진사대부를 제거하도록 하고, 볼기가 아닌 등에 [[곤장]]을 때려 죽게 한 과정은 고려사 이숭인 열전과 조선왕조실록 정도전 졸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유생들의 반발을 제압하기 위해 그랬다는 것은 각색. 실제 기록에서는 사실상 정도전이 사적으로 쌓인 원한을 앙갚음하기 위해 저지른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태조실록을 기록한 것은 정도전을 죽인 이방원 일파이므로 정도전이 어느 정도 비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에 극중 해석은 그리 무리한 해석은 아니다. 극중에서는 생략되었지만 정몽주도 정도전 및 그 일파들을 상대로 같은 수법을 사용하려던 적이 있다. * 극중 태조나 대신들이 [[의안대군 이방석]]을 '의안군'으로 부르는데, 실제로는 이방석은 '''개국 직후 세자가 되었기 때문에 군의 작위를 따로 받지 않았다.''' 의안대군이 군의 작위를 받은 것은 사후 형인 [[태종(조선)|태종]]에 의해 소도군(昭悼君)[* 소도공(昭悼公)이라고도 불렀다.]의 [[시호]][* 다른 왕자들은 생전에 존호(尊號)를 받았지만 '소도'는 사후에 애도하는 의미를 담은 시호로서 준 것이다]를 받았을 때가 처음이며,[* 이때는 이미 왕자에게 대군의 작위를 쓰고 있었지만, 태종이 [[신덕왕후]]에 대한 예우를 후궁격으로 격하시켜 버렸기 때문에 신덕왕후의 소생인 이방석은 후궁 소생으로 취급되어 군의 작위를 받았다. 덧붙여 조선 건국 직후에는 왕자와 공신들이 모두 '군'이었고 이후 공·후·백으로 바뀌었다가, 태종 때 다시 각각 대군·부원군·군으로 바뀌었는데 이방석의 동복형인 [[무안대군|무안군]]도 후궁 소생으로 취급되어 군이 대군으로 바뀌지 않았다.] 의안대군(宜安大君)의 존호를 받은 것은 1680년 [[숙종(조선)|숙종]]에 의해 추증된 것이다. 즉 '의안군'이라는 존호는 존재한 적이 없다. 명백한 오류로서 아쉬운 부분이다. * 마찬가지로 세자 책봉의 문제가 오가고 있는 와중에 [[이방과|영안군]], [[이방원|정안군]], [[이방간|회안군]], [[이방번|무안군]] 등의 호칭이 나오는 것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실록에 의하면 왕자의 책봉 자체는 태조 1년(1392년) 8월 7일의 일로 세자 책봉일인 태조 1년 8월 20일보다 며칠 빠르기는 하지만, 왕자의 책봉시 이미 [[의안대군(이방석)|의안대군]]이 빠져 있는 것을 보면 이 때 이미 세자가 누군지 기정 사실화 되었다고 볼 여지가 있기 때문. * 태조가 중전 강씨와의 독대 이후 직접 총명한 [[의안대군(이방석)|의안대군]]을 세자로 지목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처음에 배극렴, 조준, 정도전과 의논할 때 갑자기 중전 강씨가 침전 밖에서 큰 소리로 통곡을 하는지라 태조가 [[무안대군|무안군]]을 단호히 세자를 지목했다. 그러나 배극렴, 조준, 정도전이 퇴궐한 이후 다시 의논한 끝에 태조를 알현한 자리에서 방석을 밀었고 이에 의안군 방석이 세자가 된 것. 정안군 VS 의안군 구도를 강조하기 위해서 각색한 듯하다. * 같은 시대를 다룬 이전의 사극들과 다르게 이성계의 아들인 왕자들을 부르는 작위가 '''[[대군]] 대신 [[군(작위)|군]]으로 나온다'''. 조선 초기 왕자와 공신의 작위는 자주 오락가락했는데, 처음에는 군으로 봉했다가 태조 5년에 [[오등작]] 품계를 따라 이성계의 형제와 친아들은 공(公)으로, 조카를 비롯한 방계 왕족은 후(侯), 기타 공신들은 백(伯)으로 봉했다.[* 따라서 이 드라마가 끝날 즈음에는 세자를 제외한 왕자들의 존호를 '군'에서 '공'으로 바꾸어서 표기했어야 옳은데 이 점은 반영되지 않았다. '대군'이라고 쓰는 오류를 내지 않은 건 좋았으나 '공'으로 바꾼 건 반영되지 않은 점은, 방석을 의안군이라고 잘못 지칭했던 것과 더불어 아쉬운 대목.] 이후 [[태종(조선)|태종]] 즉위 이후 천조국의 오등작을 참람되게 따를 수 없다 하여[* 흔히 '재야사학'을 자칭하는 부류들이 주장하는 맹목적 사대주의가 아니라 정도전 집권기에 경색되었던 명나라와의 관계를 원만히 하기 위해 펼친 정책이였다. 조선이 황제국 용어를 고집하면서 얻을 수 있는 내부적 이익은 이에 비해 상당히 적었다.] 공, 후, 백을 각각 대군과 부원군, 군 등으로 고쳐부르게 하면서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정도전에서는 이 호칭의 변화를 제대로 반영한 것이다. 이전의 사극은 조선왕조실록이 완역되기 이전에 쓰였던 관계로 태조나 정종 시기 왕자들의 칭호를 대군이라 부르는 오류를 낸 사례가 많다. * 세자 책봉과정에서 나왔던 "나라가 태평할 때는 적장자를 왕위에 올려야 하고, 난세일때는 공이있는 자를 왕위에 올려야 한다"라는 말은 실제로 실록에 있는 내용이다. 역사에서 이 말은 조준이 했다. 한편 극중에서 정도전은 덕망이 있는 자를 왕위에 올려야 한다고 말하는데 실제 역사에선 그냥 다른 대신들과 의견을 같이한 것으로 되어 있다. * 조선으로 바뀌면서 내시가 환관으로 바뀌었다. 원칙적으로 따지면 고려시대 내시도 고려말쯤되면 환관이어야 하지만 시대변화를 느끼게 하기위해서 조선이 되자 내시가 환관이 맞는 것으로 표현한듯 하다. * 41~42회에서 이성계가 즉위하자마자 드라마가 정도전의 활약상 대신 세자 책봉문제를 맨 처음으로 다룬 것에 대해 불만을 표한 시청자들이 많았는데, '''드라마 스토리 전개가 역사에 맞다.''' 의안군 이방석이 세자로 책봉된 것은 이성계가 즉위한지 '''고작 1달 후''' 였다. 다만 세자 책봉 이후에도 나레이션으로 업적을 날림처리했다는 비판이 많았는데, 사실 정도전의 초창기의 업적은 드라마 스토리로 구성하기에는 극의 긴장감이 떨어지고[* 책 편찬, 제도 정비 같은 업적의 경우 드라마에서 필요한 갈등요소가 끼어들 틈이 많지 않기 때문, 잘해야 조선경국전이나 한양 천도에서 얽힌 스토리인데 작가의 창작이 너무 많이 개입되면 [[기황후(드라마)|기황후]]처럼 왜곡될 수도 있다. ~~당장 정도전도 양지 스토리에 비중을 두었다가 시청자의 비판을 받았으니...~~] 실록에도 그 기록이 많지 않다.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jeongdojeon&no=77099&page=1&search_pos=-77116&s_type=search_all&s_keyword=%EC%9D%B4%EC%A7%80%EB%9E%80|참고]] * 세자 책봉을 반대할 때 이방원 뿐만 아니라 이방간, 이방의도 반대하는 것으로 등장하지만 자막으로 표시도 되지 않고 구분도 되지 않게 나온데다가 캐스트 명단에도 나오지 않는다. * [[조준(조선)|조준]]이 의안군의 세자 책봉 교서를 쓰라는 이성계의 어명을 거부하는데 사실이다. 다만 이때 그가 거부한 사람은 이방석이 아니라 이방번이다. 태종실록 조준 졸기에는 태조가 조준에게 종이와 붓을 주며 이방번을 세자로 쓰라고 하였으나 거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준 패기 후덜덜덜덜덜~~ * [[배극렴]]이 41회 후반부부터 안색이 안좋은 상태로 등장하다가 42회에서 갑자기 죽는데 실제로 이성계 즉위 4달후에 죽는다. 실록에는 태조가 친히 빈소에 조문했으며 매우 슬퍼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것을 반영하여 이성계가 홀로 배극렴과의 추억을 회상하는 장면이 나온 듯하다. 한편, 배극렴은 아들이 없어서 외손자가 장례를 주관했다.[*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태조 2권, 1년(1392 임신 / 명 홍무(洪武) 25년) 12월 2일(무신) 1번째기사] * 이성계가 개국 초에 이방원을 동북면으로 보낸 것도 사실이다.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108008_001|#]] 날짜를 보면 이 명을 내린 날이 이방원이 정안군으로 책봉된 바로 다음날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왕자들을 책봉하던 시점에 이미 후계구도가 윤곽이 잡힌 것을 보면 이성계가 이방원을 동북면으로 보낸 목적이 드라마와 비슷할 가능성이 있다. * 이방원의 부인 민씨, 즉 훗날의 [[원경왕후]]를 모두 군부인 마님으로 부르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민씨는 이방원이 정안군에 책봉된 후 바로 정녕옹주(靖寧翁主)[* 남편이 정안군(靖安君)이니 '안' 자를 뜻이 통하는 '녕' 자로 바꾼 정녕옹주에 봉해졌다. 부부의 작호를 세트로 지은 것.]라는 작위를 받았다. 고로 이전에 신료들이 잠저 시절의 신덕왕후 강씨에게 택주님이라 부르듯이 민씨에게 역시 옹주라는 호칭으로 불러야 맞다. * 이성계가 [[성계탕]]을 먹으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비록 궁 밖으로 나와 성계탕을 직접 먹은 것은 각색이나, 실제 성계탕 설화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개성 사람들은 죽은 최영 장군과 고려의 충신을 기리기 위해 제사를 지냈는데, 이때 제물로 바쳐진 돼지를 '성계육'이라 했으며, 돼지고기를 썰어 국을 끓여 먹었는데 이때의 돼지탕을 '성계탕'이라 불렀다. 이는 바로 이성계가 돼지띠였기 때문이다. * 이지란이 [[신덕왕후]]의 조카딸인 곡산강씨(谷山康氏)와 혼인하게 된 것을 이성계가 늦장가라고 놀리는 장면이 42회에 나오는데 실제로는 이 혼인은 두번째 혼인이다. 이 혼인을 하기 이전에 함안윤씨(咸安尹氏)라는 부인이 있었다.[* 함안 윤씨는 영의정 윤희보의 딸로서 매우 자유분방한 여인(…)이었는데, 고려사,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홍주목사 서의에게 시집갔다가 한 번 서의를 '''미워하여 쫓아내고''', 판사 김세덕와 재혼했으나 과부가 되었다. 그리고 보국사의 중과 간통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인임이 윤씨에게 뇌물을 받고 이지란이 공이 많다고 하여 결혼을 주선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덕왕후에 이어서 조카딸도 두번째 부인으로...~~ 그리고 이지란이 곡산강씨(谷山康氏)와 혼인하게 된 시점은 실제로는 알려지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